▶ 글 내 용

작성자
楊載昌
게시일
2007-06-12 오후 5:25:02
제 목
武夷山 探訪記(水廉洞 九曲溪)
내 용
1)수렴동(水廉洞)가는 길
異域萬里黃砂의 나라 中國의 하늘은 모처럼 맑았다.
어제 저녁에 가이드가 내일은 武夷山 水廉洞 探訪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내 마음은 들떠있었다. 70年 前의 얘기다
消風가기로 한 前날밤을 꼬박 새웠던 일을 회상했다. 9시50분에야 무이산 가는 버스를 탔다. 어제 처음 車에 오르면서 自己를 中國人 이라고 紹介했던 朱氏姓을 가진 가이드가 아침부터 열을 올리고 있었다. 岩茶 이야기를 지루하게 했다. 아무렇게나 놓은 돌계단이인데 간격이 고르고 움직이는 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몇 계단이나 됩니까?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런 질문 처음인데요 하면서도 888 계단 이라고 했다. 길 옆 산자락 바위틈새 손바닥만한 공지에는 어김없이 茶나무가 정연하게 심어져있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水廉洞이란 표지석이 있는 곳에 이르니 10시 30분이다.
수렴동에 들어가며 燕子峯(연자봉)을 보니 높이 깍아 세운 커다란 3개의 바위가 三曲屛(삼곡병)을 이루었고 무이산에서 가장 큰 바위굴인 水廉洞은 높이가 100M나 되는데 정상이 비스듬이 앞으로 내밀어서 항아리 반쪽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침 가물어서 물줄기가 내려오다가 부서져 비처럼 지면을 적시고 있었다.
水廉洞 절벽 아래 바위산을 등지고 계단을 올라가니 三賢祠(삼현사)가 있다. 이곳은 劉子휘(유자휘1101-1147)와 朱熹(주희1130-1200)와 劉甫(유보1100-1181)를 모신 祠堂이다. 유자휘는 주희의 스승으로 무이산 오부리에 있는 屛山書院(병산서원)에 은거하며 수렴동에 와서 朱子를 가르친 분이다. 1147년에 유자휘가 죽자 이 곳에 사당을 세우고 朱子가(영원히 뵙는다)는 뜻으로 百世如見(백세여견)이란 현판을 써서 붙였다.
그 뒤에 朱熹와 劉甫가 죽자 사람들이 유자휘의 좌우에 모시고 三賢祠라 한것이다. 청나라 때엔 스님들이 삼현사를 차지하기도 하고 뒤엔 孔子 老子 釋加를 모시고 三敎堂(삼교당)이라고 한적이 있는데 1944년에 다시 삼현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삼현사의 왼쪽 벽에는 朱熹(주희)가 쓴 글씨로 讀書起家之本(독서기가지본)循理保家之本(순리보가지본)和循齊家之本(화순제가지본)勤儉治家之本(근검치가지본)이란 詩句(시구)가 해자체로 陰刻되어 있었다. 800여년 전의 朱熹先生(주희선생)을 뵙는 듯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前面 岩壁에는 活源(활원)이란 큰 글씨를 전자체로 새겨 놓았고 그 아래 쪽엔 水廉千丈垂丹壑(수렴천장수단학)晴雪長年舞翠첨(청설장년무취첨)赤壁千尋晴弗雨(적벽천심청불우)明珠萬顆畵垂簾(명주만과화수렴)이란 詩文(시문)이 岩刻돼 있었다. 우측에 행초서로 된 岩刻文이 있는데 시문이 아니라 당시의 내력을 적은 기록문 이였다.
劉甫(유보)는 수렴동에서 주희와 蔡元定(채원정) 등과 교유한 南宋(남송) 때의 학자였는데 1181년 7월 23일에 주희와 채원정이 유보의 초청으로 이 곳에서 놀았다는 주희선생의 글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곳은 3월부터 5월이 雨期이지만 금년은 아직 큰 비가 없어 수량이 적어서 수렴동의 폭포장관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내려오다가 永樂禪寺(영락선사)에 들렀다.(12시5분) 대만성 남투현에서 복건건재사를 운영하는 謝添福(사첨복)과 구서향 내외가 헌납한 절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지금은 大雄寶殿(대웅보전)하나 뿐인데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2)九曲溪(구곡계)를 뗏배를 타고
武夷山 가는 버스에서 가이드 朱가 들려준 무이산 이야기.
옛날 무이산 일대에는 武族(무족)과 夷族(이족)이 두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족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농사에 힘쓰며 가축을 길렀다. 武(무)족들은 산을 열어 나무와 대와 꽃 그리고 과수를 심어 산성을 쌓고 살았다. 이족들은 성을 빼앗고자 싸움을 일으켜 무족을 공격하니 장기간 싸움이 계속 되었다. 두 부족은 사상자가 많이 생기고 가옥이 파괴되어 이재민이 생기고 기아와 병마에 시달리어 양쪽이 모두 못살게 됐다. 어느 날 흰 머리와 흰 수염을 가진 늙은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두 부족에게 타이르기를 한 집안을 이루어 세세대대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며 밭을 갈고 차를 심어라 .(成爲一家, 世世代代, 相親相愛, 和和樂樂, 耕田種茶) 하고 떠났다.
두 부족은 한 마음으로 밭갈이에 힘쓰며 서로 사랑했다. 武族과 夷族이 화합해서 살았던 곳 그래서 武夷山 이라는 地名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이산 일대를 일곱승지로 나누는데 36봉우리 99개의 바위산 72개의 洞(동) 108개의 景(경)이 있는데 그 중에서 九曲溪(구곡계)가 으뜸으로 절경을 이룬다고 한다.
九曲溪(구곡계)는 三保山(삼보산)에서 발원해서 星村(성촌)을 지나 武夷宮(무이궁) 앞 崇溪(숭계) 에 이르는 약 9.5km 거리인데 우리 일행은 상류 過淺灘(과천탄)에서 竹筏(죽벌) 대나무로 엮어 만든 뗏배에 6명씩 나누어 타고 하류를 향해서 내려갔다. 뗏배에는 사공 두 사람이 앞 뒤에서 긴 삿대를 가지고 방향과 속도를 조정햇다.
차고 넘치는 물 줄기가 아홉 구비를 펼치고 있었다.
출발은 一曲(일곡)이 아니라 九曲(구곡)부터다. 상류에서 하류를 향해서 뗏배를 타고 내려가기 때문에 구곡을 역순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過淺灘(과천탄)이 九曲이며 芙蓉灘(부용탄)의 동서쪽이 八曲이고 獺控灘(달공탄)이 七曲이다. 여기서부터 비가내렸다. 안내자의 설명을 열심히 적으려 했지만 메모지가 빗물에 젖는 바람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이 때 가이드가 술잔을 돌렸다. 한 잔 술이 얌얌했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배가 바위 모퉁이를 돌면서 물 안개 사이로 六曲(육곡)이란 岩刻이 선명하게 보였다. 절벽에 새겨진 詩句를 놓칠세라 잽싸게 메모를했다.
一溪貫群山(일계관군산)한 줄기 시내가 뭇 산을 뚫고 흐르는데. 靑淺영九曲(청천영구곡)맑고 엷음은 九曲에 영롱하구나. 溪邊列巖峀(계변열암수)시냇가에는 바위들이 널려있는데. 到影浸寒綠(도영침한록)그림자는 거꾸로 물속에 잠겨있네. 宋代(송대) 李綱(이강)의 詩였다.
비에 젖은 메모지를 들고 쩔쩔매는 사이에 平林渡(평림도) 五曲을 지나쳤다. 비는 그치고 뗏배는 여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뱃전을 두둘기는 물결은 아름답기 그지없고 양쪽 언덕 너머 기이한 봉오리는 수려하고 기괴한 바위는 교묘하고 대 숲은 무성했다. 물속에 거꾸로 비치는 바위산이 어른거리며 푸른 빛깔은 온 시내를 물들이고 마치 비취자갈을 쏟아 놓은 듯 했다. 암벽사이에 이름 모를 꽃들도 우리를 반기는 듯 화사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古錐灘(고추탄) 四曲이 나타났다. 비가 또 뿌렸다. 저 호수는 깊이가 38m 나 되는데 물이 돈다는 말을 했다. 호수는 짓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잠시 후 배는 雷개灘(뇌개탄) 三曲으로 들어섰다.저 바위는 큰 군함의 앞 머리입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빨리 피해야 합니다. 정말 배머리가 다가오는 환상을 느꼈다. 浴香潭(욕향담) 二曲이 나타났다. 가이드는 호수를 가리켰다. 저 호수는 구곡에서 제일 깊은 곳 입니다. 이때 부터 간격을 유지해오던 뗏배들이 거리를 좁혀가면서 하나의 선달을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뗏배선단은 一曲 崇溪(숭계)에 들어섰다.
이때 부터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종착지 선착장에서 내렸을 때는 옷은 흠뻑 젖어있지만 머리에는 九曲의 정경이 가득 차 있었다. 장장 2시간 30분의 九曲溪 探訪은 빗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영원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2007年4月12日
抱川 典校 楊 載 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