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내 용

작성자
양철곤
게시일
2009-07-22 오후 4:42:19
제 목
시조님의 탄생년도가 의문이라는 점에 대한 답
내 용
충헌공 시조님의 탄생년도는 방촌(황희 정승) 선생이 지으신 상당백 충헌공의 행장에서 1394년 7월에 서거하셨는데, 향년 92세라고 명확하게 기록된데서 부터 1303년생이라는 근거를 찾아야할 것 같읍니다. 방촌선생은 1363년(공민왕 12년)생으로 31세 때 충헌공이 서거하셨고, 또한 방촌선생은 3세이신 천진 선조님의 사위였고, 충헌공의 증손서가 되는 분이었읍니다. 따라서 행장 내용에 들어 있는 "1394년에 서거하셨고, 향년 92세이셨다"는 기록을 믿을 수 밖에 없읍니다.
이 기록 외에는 충헌공의 탄생년도는 찾아볼 수 없을것 같습니다. 우리 청주양씨의 1, 2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3세이신 백연 선조님에 관하여는 여러 곳에서 볼수있습니다.무관으로서 한때는 최영장군의 휘하 장수이셨고, 이성계와 대등한 위치에서 활동하셨던 점으로 보아 백연선조님의 출생년대는 1340년대 초라 추정할 수 있읍니다. 1379년에 이인님 등 주변 인물들의 모함으로 처형당하셨지만, 1363년의 흥왕사변에서의 공, 1365년에 밀직부사로서 노국공주의 죽음을 알리러 사신으로 가신 일, 1375년에 안주대원수로서 초적을 격퇴시키신 일, 1377년에 찬성사로 승진하셔서는 진주 반성현에서 왜구를 격파하신 일 등을 고려할 때, 3세로서의 활동하신 시기가 추헌공과 조손관계로서 버서나지 않는 기간이라 생각되며,의문될만한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충렬왕 때 제국대장공주가 아니고,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과 혼인하여 충정왕 3년(1351년)에 우리나라에 들어 오실때, 배행하셨는데,이것을 충헌공 행장에서 충선왕 3년이라고 오기하는 머리에, 이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우리 대동보 상의 여러 곳에서 충선왕 3년이라는 잘못된 내용을 볼 수 있읍니다. 또한 충헌공께서 세공을 크게 삭감하시고, 나라의 정치발전에 기여하신 시기가 지정(원나라 순제때의 년호) 말년경(1360년대 중반) 으로 기재되어야 할것이 홍무(명의 주원장 때 년호) 말년으로 오기된 점도 많이 연구검토해 보아야 할 점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바와 같이 1322년이면 충헌공께서 20세가 되신 해인데, 상호군이 되어 심왕(충선왕의 조카, 이름: 고)의 균지를 갖고 이겸과 같이 원나라 하정사로 가셨었다는 내용은 1987년 대동보 수보시 정규 당시 대동보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이 원류고를 쓰면서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참고하여 쓴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명 이인일른지는 몰라도 연세와 직위라는 점에서 볼때 선듯 이해가 안가는 점이나, 이렇안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충헌공 시조님은 귀화하지 않은 상태라서, 우리나라 사람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호군이라는 직명을 우리나라의 무반 직제로 고려해볼 이유가 없다는 점이며, 이겸과 같이 원나라에 하정사로 가실 때, 통역관겸 수행무관의 신분일 수도 있스므로 외교상 신분의 상호군이라는 직급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글의 내용에 본관이 청주로 된 것은 시조할먼님이 청주한씨이어서 자연스럽게 본관이 청주로 된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러한 원인도 있겠지만 충헌공께서 세공의 삭감이나 문물 제도의 도입 등으로 나라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신 공로로 나라에서 벽상삼한(정 1품의 품계)을 봉하고 청주로 사관했기 때문에 본관이 청주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 됩니다. 답에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여주시기 바라며, 언제나 의심스러운 점은 서로 제시하여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끝